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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과 시민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홍성필(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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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기춘 작성일10-02-19 13:06 조회2,7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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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하십니까!
저는 자랑스런 모교를 9회에 졸업하고 현재는 서울중부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경찰공무원 홍성필입니다.
처음 저에게 이기춘선배님이 글을 청탁하였을 때에는 몇 번을 손사래치며 이리 뺀질 저리 뺀질 도망다니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글이나마 제가 하고 있는 경찰의 일을 소개함으로써 크게는 저와 같은 경찰관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작게는 저와 제 일을 따뜻하게 격려해 주실 수도 있는 홍보의 장이 되지는 않을까 싶어서 부족하나마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비록, 매일같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하여서 경찰관의 비리, 부패, 무능 등 경찰관의 좋지 않은 면을 보았다면 그것은 전국 15만 경찰관중 극소수에 불과하며 대다수 15만 경찰관들은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여 범죄와의 끊임없는 전쟁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최일선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음을 알리고자 합니다.

제가 국립경찰공무원으로 임용되면서 한 가지 마음속으로 다짐을 해 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부모님이 현재 저희 4남매를 낳아 잘 가르쳐 주시고, 이 만큼 키워 주신 은혜입니다.
지금은 그래도 집 한 칸이라도 내 집에서 살고 있으며 부유하지는 않지만, 남에게 피해주지도 않으시고 손 벌리러 다니지도 않으시며 저희들에게 항상 옳은 일에 적극적 자세로 임하시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5년 전 저희 부모님께서는 전북 고창이라는 시골에서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현, 서대문형무소 뒤 달동네)콧구멍만한 방 한 칸을 얻어 이사 오셔서 신혼생활을 하시며 과일 노점상을 하셨는데, 어린 저를 포대기에 업으신 어머님은, 아버지가 자전거로 과일을 사오시면, 영천 시장 한 귀퉁이에서 과일 노점상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시장입구에서 과일을 펼치고 장사를 하던 중, 당시 순경(어머님표현)들이 뇌물이나 혹은 과일을 주지 않으면 시장 바닥에 펼쳐놓은 사과와 배를 군화발로 차며 노점상을 하지 못하게 폭력적으로 훼방을 놓았다고 한다.

울며불며 한번만 봐달라고 순경에게 매달리며 사정을 해도 순경들은 어머니의 간곡한 사정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어머니를 내동댕이쳤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5, 60년대는 사회구조상 경찰관의 세력이 막강하여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지난날의 어려웠던 시절을 들었던 저는 경찰관으로 임명 받으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을 하였습니다.
“난, 절대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로운 일에 앞장서며, 부자들의 삶보다는 가난한 자의 삶을 돌아보고 그 들의 말을 경청하자”고…

그 다짐을 하며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초심을 잃지 않으면서 근무하여 형사계와 파출소에서 근무한지 어언 20년이 지난 저는 지금도 그 다짐을 좌우명처럼 마음에 되새기며 그 길을 이탈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고, 또한 그렇게 살았다고 자부 합니다.
더군다나 저의 아들이 저의 뒤를 이어 경찰관 시험을 준비 중에 있으므로 더욱 더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경찰관의 표본을 삼게 하기 위하여서라도 정년 퇴임하는 그 날까지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제가 하는 일마다 문제의 해결도 잘 되는 편이었고, 운도 좋아서 각종 신문 매스컴에도 자주 등장하여 경찰관들의 칭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중, 몇 가지 저의 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약 20년 전 서울경찰청 형사과 형사기동대에서 근무 후 처음으로 일선인 모 경찰서 파출소에서 근무하였습니다.
당시 파출소 고참인 김모 경장이 저에게 관내 몇 개소의 찻집에서 월 정금(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관례임)을 받아오라고 해서 제가 “한 번도 못해본 일이라서 안 가겠다”고 거절을 하였더니 그 다음부터는 제가 순찰을 나가든지, 소내에서 근무를 하던지 공문서 작성하여 본서에 보고를 하든지 말든지 아예 관심도, 관여도 하지 않고 혼자서 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왕따를 시켜서 다른 곳으로 가버리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파출소장이신 모소장님의 따뜻한 배려와 격려로 업무지도를 하여 주심으로 역경을 이기고 보직 기간 내내 무사히 잘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지낸 파출소 시절을 접고 1992년 12월경 저는 지하철수사대에 인사 발령을 받았습니다.
지하철 내 소매치기, 성 추행사범 전담반의 외근형사업무로 소매치기범 및 성 추행범 검거에 주력하였습니다.
저는 운이 참 좋아서 제가 속한 형사반의 형사들은 능력과 기량이 뛰어난 베테랑 형사들이었기에 정말 많은 노하우를 전수받게 되었습니다.
전동차가 플레트 홈에 들어와 2,000여명의 승객들이 내리고 타는 가운데 소매치기범을 발견하여 미행, 범행 장소에서 현행범으로 검거하는 일이란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1년 정도 되었던 어느 날, 제가 모 소매치기범을 검거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매치기범은 무릎을 꿇고 나에게 울면서 이렇게 간청 하였습니다.
“형님, 한번만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정말 다시는 소매치기 안 하겠습니다. 제 형님이 사업을 하시는 분이신데, 그곳에 가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사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저렇게 간곡히 사정을 하며 눈물 을 흘리는데 몇 년씩 썩게 교도소로 보내기가 좀 미안했습니다.
정말로 ‘나만 눈감으면 되는데’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사를 다 마치고 검찰에 구속영장을 신청하였습니다.
몇 시간 후 그 소매치기의 형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검정색 퓨마스포츠 가방의 쟈크를 열어 보이면서 나에게 동생을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열려진 그 가방을 들여다보니 만원짜리 지폐가 다발로 가득하였습니다.
솔직히, 그렇게 큰돈을 본적이 없는지라 가슴이 두근두근 하는 것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게 웬 것입니까?”
“형사님, 제가 저 불쌍한 동생 놈 때문에 삽니다. 제발 한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평생 은혜로 생각하고 감사 하겠습니다.”
“빨리 이 가방 들고 나가십시오 만약, 계속 여기에 계신다면 공무원뇌물공여죄로 입건하겠습니다.”
저는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쓸어안으면서 사무실 문을 닫았습니다.
지금은 십 수 년의 세월이 흘러서인지 가끔씩 그 녀석이 생각납니다.
교도소로 들어간 후 나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형님(모든 소매치기범들은 형사를 이렇게 지칭함), 이곳에 온지 벌써 몇 달이 지났습니다. 처음에는 형님을 많이 원망했었습니다. 뭐 저런 경찰관이 다 있나 싶어 분함을 삭히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내 형님의 능력만 믿고 걸핏하면 사고치고 형님이 돈 싸 들고 와서 해결을 해주다 보니, 제가 이렇게까지 망가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찍 형님 같은 형사를 만났더라면 벌써 제 운명이 달라졌을 텐데요. 허허. 이제 제가 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이곳에서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서 나가겠습니다. 이건 진심입니다만 정말 형님 같은 경찰관들이 많이 있어야 됩니다. 아무쪼록 몸 건강하십시오. 형님의 답장 부탁합니다.”
약간 변색된 듯 노르스름한 편지지에 거칠게 써진 그 녀석의 편지를 다 읽은 저는 코끝이 찡한 것을 억지로 참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습니다.
저렇게 착한 놈을 내가 결국 교도소로 보내야 하는 것이 맞는가 싶어 한참 동안 제 판단과 저의 정체성에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저는 2004년 8월 서울경찰청 산하 31개 경찰서 대상 절도범 검거실적 1등으로 경장 특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승진도 쉽게 되는 시절이지만, 당시만 해도 정말 한 계급 올라가기가 왜 그리도 어려웠던지!
소매치기반에서 근무한지 약 6년이 되자 저의 얼굴을 잘 아는 소매치기범들은 현장을 떠나 버려 계속 근무의 의미가 없다는 판단아래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경찰공무원이 좋은 것이라면 최단 기간이 지나면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타 보직 업무를 경험하며 근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2008년 이른 봄 각종 메스콤에서는 안양, 일산 초등생 납치 살인사건과 납치미수 사건 등으로 온통 도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참다 못한 이명박대통령께서 경찰청장에게 질타를 하시고 대책을 강구하시라고 하여 그 해 3월경 경찰청장님께서는 전국의 경찰서 형사과에 “실종사건전담수사팀”을 발족하게 하셨습니다.
그 때 저는 시내 모 경찰서 강력 팀에서 근무 하던 중 “실종사건전담수사팀”의 신임팀장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실종사건수사팀에서 일을 하다 보니 별일이 다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학원에서 끝나고 집으로 오던 중 실종되었다"
"내 애인을 옛날 애인이 납치하여 감금하였다"
"딸이 선생님한테 혼나고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고 실종이 되었다"
심지어는 " 내 마누라가 어떤 놈하고 눈 맞아서 도망쳐서 실종되었다" 등등
그 사연도 별나고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거야 말로 "개"나 "소"나 "오징어"나 "쭈꾸미"나 모두 "실종" 이라고 합니다.
사실 수사에 착수하여 실종대상자를 찾고 나면 인터넷방, 만화방, 공원, 친척집, 친구집, 게임방에 있으면서 가족과 연락을 하지 않은 해프닝이 많은 것이었지요.

그러던 중, 8년 전 아이가 실종되어 미제가 된 사건을 신중하게 수사하였습니다.
주소지인 전남 장성, 서울, 수도권 보육시설 등에서 실종자의 사진과 접수대장을 일일이 대조 및 탐문 수사하여 2개월 만에 부모와 상봉시키는 개과를 올리고, 크게는 경찰관들의 사기가 충전되고, 개인적으로는 경찰청장님의 즉 상금과 표창장을 수여 받았다.

지난, 10월에도 15년 전에 실종되었던 아이(지금은 29세 아가씨)를 용인정신병원에서 발견하여 가족의 품에 안겼습니다.
앞으로도 내게 주어진 일이 국가의 공익과 시민의 안녕이라는 전제라면 이를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 갈 것입니다.

비록 그 일이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다 하여도 저는 그 일을 저의 천직이자 신념이라 생각하고, 끝까지 대한민국의 경찰관중 한 사람으로 부끄럽지 않은 길을 걷는 동문이 되겠습니다.

또한, 저와 같은 길을 걷길 희망하는 후배님들의 좋은 표본이 되도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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